
트라바체스의 롱고르드 저택에 말과 한 청년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한 때는 지키고자 하던 이가 여럿 있었지만, 홀로 살아 남았던 저택이었다. 아픈 손가락이었다.
보리스는 문을 열고 로비를 지나 윗층으로 올라갔다. 삐걱삐걱. 그 소리가 오랜만의 주인을 반기듯 뒤를 따랐다.
윗층에 도착하자마자, 서재 앞으로 향했다. 당겨보지 않았지만 아직도 잠겨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보리스는 고개를 숙였다가 올렸다. 그리고 복도를 따라 큰 초상화 앞으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 낡고 부식된 모습. 이제 얼굴조차 남아있지 않았지만, 예전 모습을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보리스는 무의식적으로 제 옆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발걸음을 옮겼다.
쌓여있던 낙엽이 짓밟혀 지나간 자리 위로 길이 생겼다. 끼이익. 다음으로 향한 곳은 어머니의 방이었다.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천장과 벽이 부식되었지만, 덜한 곳은 먼지만 쌓인 채 여전했다. 보리스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화병 앞으로 향했다. 갈대가 바싹 마른 채 그대로였다. 코를 대자, 있을 리가 없는 잔향이 남았다. 보리스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방을 나서 복도를 지나 아랫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자신과 형의 방에 도착했다.
이 방도 다른 곳과 마찬가지였다. 보리스는 제 방의 침대 머리맡에 놓인 예프넨 옷을 만졌다.
"다녀왔어."
이 한 마디를 할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던가. 보리스는 목이 매이는 듯 했다. 큼. 헛기침을 내뱉으며 목을 가다듬었다. 주머니에서 덮개가 달린 거울을 꺼냈다. 부탁대로 잘 가지고 있었어. 형은 잘 지내? 뒤이어 나온 말들은 다행히도 자연스러웠다. 혼자인 방에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몇 시간이 지난 걸까. 밖이 어두웠다. 보리스는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거울을 주머니에 넣었다. 문을 열고 다시금 밖으로 나왔다. 벽에 기대두었던 짐을 챙겼다. 그리고 저택 뒷편으로 나아갔다. 주위에 반딧불이가 노닐며, 주위를 비췄다. 어두웠던 밤이 달빛과 어우러져 환하게 물드는 순간이었다.
쏴아아. 바람이 몰아치며 니들그래스가 물결쳤다. 보리스는 그 모습에 어릴 적 모습을 회상했다. 그러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곧 보일 것이었다. 과거, 악몽 속의 장소였던 '에메라 호수'가.
에메라 호수는 괴물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전보다 덜 을씨년스러웠다. 보리스는 호숫가에 앉았다. 가져왔던 짐 속에서 동백나뭇가지를 꺼냈다. 덜 핀 꽃봉오리가 마치 눈꽃 같았다. 보리스는 그 나뭇가지를 호수 위로 띄워보냈다. 하나 둘 놓여져 호수 위를 수놓았다. 여기에 있을 원혼이 몇이나 되는지 몰랐으나, 그들 또한 좋은 곳에 가기를 바랐다.
힘든 하루가 지나갔으니 이제는 잠잘 시간
별동별도 꼬리 끌며 엄마별 곁으로 자러 갔네
걱정말고 편히 자거라, 내가 지켜 줄 테니
아무도 우리 아가를 깨우지 못할 거예요.
캄캄한 밤이 무서워도 곧 아침이 오니까
힘든 세상 모두 잊고 눈물도 흘리지 말고
잘 자라고 키스해 줄게, 내가 곁에 있어 줄게
행복한 꿈꾸다 보면 긴 밤도 금방 가니까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그저 바람만 제 곁을 스치며, 못 핀 꽃송이들을 하늘 위로 날려보냈다. 보리스는 그 꽃이 다 날아갈 때까지 자리에서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에메라 호수를 벗어났을 무렵, 동이 터오고 있었다. 이슬에 젖은 니들그래스가 바람따라 물방울을 흩뿌렸다. 보리스는 그 사이를 걸어 롱고르드 저택으로 향했다. 근처에 묶어뒀던 말 고삐를 풀었다. 저택의 정면이 보이는 곳에 섰다.
"안녕."
그 말을 끝으로, 말 위에 올라탔다. 이윽고 저택을 벗어났다.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였다.
칼츠 가의 테라스에는 추운 겨울과 다르게 활기를 띄고 있었다. 친구들이 놀러와 있던 까닭이었다. 루시안은 다 같이 눈싸움을 하면서도 보리스가 오지 않는다며 투정을 부렸다.
"전에도 말이야. 학원에 가기 싫어서 일부러 시험 끝난 다음에 돌아오려는 줄 알았다니까?"
"시험 보고 입학한 거 아니었어?"
"맞아. 어떻게 된 거냐면"
루시안은 설명하려다가, 돌연 뒤에서 날아온 눈덩이에 머리를 맞았다.
"무슨 이야기 중이었어?"
"보리스 왔네."
다들 보리스를 반겼다. 루시안은 보리스에게 눈덩이를 던졌지만, 보리스가 피해서 뒤에 있던 막시민이 얼굴에 맞았다. 막시민도 루시안에게 던졌지만, 예상과 달리 이번엔 티치엘이 맞으면서 눈싸움으로 번졌다. 보리스는 애들과 떨어진 곳에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조슈아가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잘 다녀왔어?"
"그래."
보리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