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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쯤이었을까 어디에서 들은 말인지는 생각나지 않을 만큼 스쳐 들었던 말이 있었다. 깊이 잠들면 꿈도 꾸지 않고 빠져 아무런 소리도 느낄 수 없고 감촉도 느껴지지 않으며, 그 무엇도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고 했던가. 자신이 바로 그런 상태인 것 같았다. 아니,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 깊이 잠든 상태라고는 할 수 없나? 그렇다면 잠들었다가 깨어나고 있는 상태라고 그는 생각했다. 너무 깊이 잠들어있던 까닭일까. 아직 깨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굉장히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유로움이기 때문인지, 조금이라도 더 그 편안한 느낌에 심취하여 좋은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자네, 깨어난 것 같은데 그만 일어나지."

   예프넨은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 중년이고 적당히 걸걸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있던가 따위의 생각을 했다. 마땅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단잠을 방해하는 목소리가 불쾌해져 미간을 찌푸렸다.

 

   "허허, 이보게. 눈을 떠보란 말일세."

   예프넨은 어쩔 수 없이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꽤 오랫동안 누워있던 것인지 몸이 굉장히 찌뿌둥했다.

   "이제야 일어났네. 자네 겉보기와는 다르게 잠이 많은 사람인가 봐."

   "누구십니까."

   "음, 나? 가만 보자. 내 이름이 뭐였더라."

   예프넨은 주위를 빠르게 훑었다. 눈앞의 남자는 눈을 위로 도로록 굴리며 자신의 갈색 머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보는 방에 처음 보는 남자라. 여간 수상한 상황이 아니었다. 예프넨은 조용히 허리춤으로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당황했다. 항상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검이 만져지지 않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손을 무릎에 가져다 두었다.

   “그렇게 경계할 것 없네. 여기 사람들은 전부 깜박깜박하니까. 아, 내 이름은 리안이야. 나이는 37세지. 이제 자네도 소개해보게.”

   “.....”

   예프넨은 눈을 슬쩍 옆으로 돌렸다가 남자의 웃는 낯을 보고는 예프넨입니다. 하고 작게 대답했다.

 

   “그보다, 이 곳은 어디입니까. 제가 있던 곳은 아닌 것 같은데.”

   “그리 급할 것 없어. 조금 있으면 여기가 어딘지는 자연스레 알게 될 테니까.”

   예프넨은 다시 한 번 미간을 찌푸렸다.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몰라 답답했다. 그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마지막을 떠올렸다가 표정을 굳혔다. 분명, 긴급한 상황 속에서 자신은 죽음을 맞이했다. 처음 보는 방. 여유로운 분위기.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는 남자. 갑자기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졌다.

   “아, 이제 좀 알 것 같지 않나?”

   “...”

   예프넨은 눈앞에 들이밀어진 남자의 얼굴을 보자 맥이 풀렸다. 자신의 심각한 생각과는 영 상관이 없어 보이는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그래, 고민해봤자 해결될 일이 아니지. 어찌된 상황이든 자신이 죽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는 상황을 좀 더 낙관적이게 보기로 했다. 죽었다가 살아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이 겪었던 그 상황 자체가 꿈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예프넨은 조소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자신이 웃겨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문득 어떠한 사실이 떠올랐는데 처음 알게 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그의 머릿속에 박혀들었다.

   “지금 막 알게 된 사실이 있긴 합니다.”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남자는 머뭇거리는 예프넨을 차분히 기다렸다. 그를 배려했다기보다는 이러한 상황에 무척이나 익숙한 사람처럼 보였다. 예프넨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어 말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내뱉었다.

   “저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 곳은 저와 같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곳이군요.”

   예프넨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떨어진 낙엽이 밟혀 바스라졌다. 나무마다 잎이 빨갛고 노랗게 물들어 바라만보아도 눈이 즐거웠다. 사부작사부작 발을 내딛으면 바스락바스락 낙엽이 밟히는 소리가 마음에 들어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가을을 맞아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른 하늘이 꼭 그의 푸른 눈동자 같았다. 그가 이곳에서 생활한지도 벌써 세 달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처음 이곳에서 깨어났을 때만해도 예프넨은 사실과 현실의 괴리감을 느껴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다.

   이곳의 사람들은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각자의 집 또는 방이 존재했고 음식을 먹지 않으면 허기가 졌다. 가장 신기한 것은 이곳에도 계절이 존재하고 변화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산 사람같이 살아가고 있다니?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내일이라도 당장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닐지, 이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한동안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그를 이끌어준 것은 리안이었는데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산책이라도 다녀오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렇게 하루 이틀씩 밖에 나가 걷다 보니 이제는 그것이 취미가 되었다. 미래에 대한 걱정은 살아 있었을 때도 하던 것이었고 그것을 굳이 죽어서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이미 죽었는데 될 대로 되라지.

   그는 차분히 생각을 비우고 현재를 즐겼다. 걸음을 멈춘 예프넨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나무벤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잔디에 무릎을 세워 앉았다. 처음에는 무턱대고 아무 곳이나 돌아다녔지만 이 곳을 발견한 후로는 그의 걸음은 항상 똑같은 곳에서 멈추었다. 예프넨의 눈동자에 흰 동백이 가득 담겼다. 어디까지 피었는지도 모를 만큼 수많은 꽃들은 단 한 송이도 예외 없이 만발해 있었다. 동백은 겨울에 피는 꽃이 아니던가. 하지만 예프넨이 처음 이 곳에 왔던 여름부터 계속 피어있었으며, 또 신기한 것은 이 곳에 있는 그 많은 꽃들 중에 다른 꽃은 한 송이도 없다는 것과 모두 흰색이라는 사실이다. 활짝 피어 있는 흰 동백꽃을 바라보다 보면 아무 이유 없이 가슴이 벅차올랐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예프넨의 맑은 눈동자에 반짝임이 빈틈없이 들어찼다.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이는 동백꽃이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길 만큼 아름다워 정신이 아득해졌다.

   끼익-

   예프넨이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리안이 그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리안의 표정이 심각하여 예프넨이 그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밥 먹을 시간이다. 예프넨.”

   “늦었습니까?”

   “아슬아슬하지. 다음엔 더 일찍 와라.”

   예프넨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안은 눈을 반으로 접어 웃고 예프넨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리안.”

   예프넨이 돌아서는 리안을 불러 세웠다.

   “리안. 저 쪽으로 내려 가다보면 동백 꽃밭이 있는데 본 적이 있으십니까.”

   “무덤 말이냐.”

   “흰색 동백들이 만발해 있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뭐, 예쁘긴 하지. 내가 여기 온 지 얼마나 오래 됐는데 당연히 가보긴 했지.”

   “눈동자가…….”

   예프넨이 머뭇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처음엔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애써 무시하고 있던 것일지도 몰랐다. 예프넨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옅어진 그의 눈동자를 착잡하게 바라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오늘도 그곳에 다녀왔는데, 반짝이는 잎이 무척이나 예뻤습니다.”

   “음, 같이 가서 구경하자고? 난 거기 별로 안 가고 싶은데. 할 말 끝났으면 밥이나 먹으러 가자. 너 기다리느라 배고픈 거 참고 있었다.”

   “지금 리안의 눈동자가 꼭 동백 꽃잎 같습니다.”

   "하하.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칭찬이야?"

   리안은 갈색 머리카락에 연한 보라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부터 연한 것이 맞을까. 예프넨은 자신을 만나기 전에 그 색이 지금과 같을 거라고 감히 장담할 수 없었다. 유쾌하게 웃던 그의 웃음이 멈췄다. 진지하게 눈을 맞추는 예프넨의 모습에 리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는 그 모습이 참 공허하고 씁쓸해 보였다.

   "지금까지처럼 모른 척 해줘도 될 것 같은데 말이야."

   "이제, 그럴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하~ 자네는 너무 진지해서 탈이야. 그게 자네의 장점이기도 하지. 그리고… 그런 모습이 처음 이 곳에 왔던 나랑 너무 닮아서 내버려 둘 수가 없어."

   리안은 눈을 감고 먼 과거를 회상하듯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예프넨은 그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충분히 기다렸다.

   "나한테는 아들이 한 명 있었어. 그런데 지금은 그 애 이름이 뭔 지 생각이 나질 않아."

   "잊어버린 것입니까."

   "내 이름은 리안이고 나이는 37살이었네. 그리고 아들이 한 명 있었고, 자네 이름은 예프넨이지."

   "갑자기 무슨…."

   "이게 현재 내가 기억하고 있는 전부야. 나머지는 전부 이 곳에 온 이후로 망각했네. 내 눈동자가 이렇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겠지."

   예프넨은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와장창. 평화로웠던 일상이 전부 부서져내렸다. 순간 모든 것이 거짓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물밀듯이 밀려오는 현실에 숨이 턱턱 막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자네가 맨날 가는 그 곳 말이야. 자네는 아직 모르겠지만 나같이 오래 된 사람들은 이쯤 되면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 수밖에 없게 돼."

   "리안이 아까, 무덤이라고…."

   리안이 예프넨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그 곳이 아름답다고 했나? 그럴 수밖에 없지. 그건 그만큼 그들의 기억이 처절했거나, 찬란했기 때문일 테니까."

   예프넨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서 있을 수 없을 만큼 다리에 힘에 빠져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에게 다가온 것은 소름 끼치도록 잔인한 현실이었다. 그럼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다가 무엇을 잃었는지 깨닫지도 못하고, 서서히 자신의 소중했던 순간순간을 빼앗겨야 한단 말인가. 자신이 과연 그 것을 버틸 수 있을까. 하지만 이미 죽은 마당에 무엇을 할 수 있지? 자신은 그저 특별할 것 없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걸 자각한 순간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예프넨의 감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참을 수 없는 절망이었다. 리안이 그런 그를 걱정스레 쳐다보다가 어깨를 감싸 안고 토닥였다.

   "리안. 그럼, 저는… 저는…"

   "예프넨. 자네 지금 혼란스러운 거 알지만 그렇다고 이곳에서의 삶을 포기하지는 말게. 곧 알게 되겠지만, 자네가 이 현실을 버틸 수 없다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이 가을이니까 곧 열리겠구만. 자네는 여름에 와서 아직 모르겠지만 겨울이 시작될 쯤에 이 곳에서 축제가 하나 열리거든."

   "축..제 말입니까."

   "여기 사는 우리는 모든 기억을 잃는 순간 흰 동백꽃이 되는데, 그 축제에서 우승하면 붉은 동백꽃이 될 수 있어. 우리 같은 사람들이랑은 다른 높으신 분들이 주최하는 축젠데, 그 곳에서 우승하면 상으로 한 가지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고 해."

   "그렇다면, 이 곳을 나갈 수도 있습니까."

   "그 이후가 어떤지는 우승자밖에 모르네. 하지만 무턱대고 도전하지는 말게나. 더럽게도 말이야. 그 축제의 참가비가 우리 기억이거든. 실패할수록 더 빠르게 기억을 잃게 될 테니까."

   리안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라고 오랜 시간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처음 죽었을 당시에는 그도 꿈에 부풀어 축제를 참여했지만 반복되는 실패로 인해 도전 자체를 포기해버렸다. 기억을 잃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축제에 도전하지 않으면 조금이라도 더 오랜 시간 자신의 삶에 대해 기억할 수 있을 테니까. 리안은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나는 안됐지만, 자네는 나와 다르게 운동도 좀 한 것 같고.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도전해보게."

   그리고 나는 못 이루어 냈지만 예프넨 자네는 꼭 이 거지같은 상황을 벗어났으면 좋겠어. 그러면 좀 통쾌할 것 같으니까. 리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예프넨. 배고프지 않나."

   "리안… 당신은 참, 한결같습니다."

   "하하하! 그게 내 장점일세. 어서 일어나."

   몸을 일으킨 리안이 예프넨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주방에 도착한 그들은 탁자에 차려진 음식을 먹었다. 식사하는 도중에 리안이 자네가 늦게 와서 음식이 다 식었다며 투덜댔지만 예프넨은 무시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따듯함에 예프넨의 얼굴에 미소가 맴돌았다. 이곳에 와서 리안을 만나게 되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식사를 마친 후 방으로 예프넨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리안이 따라들어 와 예프넨이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오늘은 같이 자는 게 어떤가.”

   “갑자기 왜이러십니까.”

   “하하, 거절하지 마.”

   떨떠름하게 서 있는 예프넨을 제치고 리안이 그의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옆자리를 퍽퍽 쳐대며 얼른 오라고 손짓했다.

   “리안. 잡니까?”

   리안은 예프넨이 옆자리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는지 대답이 없었다. 어이가 없어진 예프넨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슬쩍 웃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리안의 올라간 입 꼬리를 보며 예프넨은 잠이 들었다.

창문을 통해 내리쬐는 햇빛에 미간을 찌푸린 예프넨이 눈을 떴다. 어제 충격적인 사실들을 들었기 때문일까. 생각보다 오래 잠들어버렸다. 자는 내내 따듯했던 옆자리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리안은 이미 일어난 것 같았다.

   예프넨은 몸을 일으키며 기지개를 피고 가볍게 머리를 털었다가 옆 자리의 놓인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몸을 굳혔다. 침대 위에 따사로운 햇살을 머금은 새하얀 동백꽃 한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 것을 두 손으로 소중하게 들어올렸다. 방을 나선 예프넨의 발걸음이 항상 가던 그 곳으로 향했다. 꽃밭에 도착한 그는 제일 볕이 잘 드는 나무를 찾아 가지에 꽃송이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처음부터 그 나무에 핀 동백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예프넨은 한참을 그 앞에 서서 나무를 바라보며 굳게 다짐했다.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리안을 위해서라도 꼭 붉은 동백이 되어주리라. 예프넨은 투명하게 빛나는 동백 꽃잎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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