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주 어린 아이는 모래바닥에 손가락을 찍는다. 아기 살결마냥 보드라운 모래는 금세 여린 힘에도 자리를 내준다. 옴폭 패인 그 자리는 점이 된다. 아이는 누른 손가락을 떼지 않았다. 그대로 힘을 주어 옆으로 죽, 긋는다. 아주 순식간이었다. 아이가 내리누른 힘 그대로 점은 뻗어나간다. 모래알갱이가 비킨 길이 제법 또렷하게 남았다. 화득득 놀라 비킨 모래들이 손가락 골짜기 안으로 사르르, 다시 들어왔지만 그런 알갱이는 몇 되지 않았다. 아주 강렬한 힘이었다. 어린 아이가 까르르 웃는다. 웃게 만드는 힘이었다. 손을 뻗은 힘이었고 아이가 의식 속에서 행한 힘이었다. 그만큼 강한 힘이었다.
선(線)이었다.
아이는 바느질을 못했다. 바늘에 찔려서도 그랬고, 애초부터 바늘이 무서워서도 그랬고, 기껏해야 손가락밖에 놀리지 못하는 그 자세를 오래 견디기 어려워서도 그랬고, 여튼 그랬다. 그 모든 이유가 핑계는 아니었다. 아이는 바느질을 못했고, 싫어했다.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에게 바느질을 가르쳤지만 그뿐이었다. 아이는 높게도 자란 하얀 꽃을 뚝 꺾었다. 길기도 했다. 손에는 벌써 하얀 꽃이 다발로 엮이고 있었다. 클로버풀 향이 짙게도 났다. 아이의 낡은 치마 끝단에 이미 풀물이 들었을 게 뻔했지만 아이는 아직 그 사실을 몰랐다. 숱 많은 머리를 통통하게 땋아내린 모양새라고, 아이는 그 생각을 했다. 아이는 그렇게 숱이 많지도 않았고, 그렇게 머리카락에서 윤이 나지도 않았다. 아주 평범한 머리카락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는 클로버 화환을 만들면서 이따금씩 아주 예쁜 사람이 땋아내린 머리다발 같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화환을 머리에 쓰면 아이는 그 예쁜 사람이 되었다. 여물지 못한 손끝이라도, 아이는 화환을 잘 만들었다. 조금 성기게 만들어도 화환은 그 자체로 예뻤다. 꺾인 꽃대 사이로 풀향기가 짙게 났다. 촘촘하게 만들어도 화환은 예뻤다. 어쩌면 만듦새는 완성도와 좀 거리가 있는 말일지도 몰랐다.
길다란 꽃대를 겹치고 겹쳐 만든 무언가는, 꽃이 달려있기에 예뻤다. 그러나 그 꽃을 한데 묶어주는 이는 결국 선이었다.
아이가 만난, 초여름의 이야기. 아이가 그리도 좋아했던 클로버는 모두 지고, 화관을 만들려 종종걸음으로 상처낸 클로버에서 새 잎이 돋아난 이야기.
“올프랑쥬 양, 오늘 공연도 힘내요.”
이네스는 그 인사를 반갑게 웃으며 받았다.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몇 번은 본 사람이었다. 이네스의 웃음은 감사함이었다. 축복을 바라는 사람이었다. 감사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이네스는 부디, 초조함이 드러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이, 허공에 떠있는 외줄처럼 다가온다. 이네스는 그 외줄을 걷고 있었다. 삐걱삐걱.
“아, 이네스. 준비해야지?”
잠시동안, 이네스는 제작자의 얼굴을 바라본다. 사람을 홀리는 무엇이다. 이네스는 그 무엇이 뭔지 몰랐다. 코끝이 아찔했다. 벽 속 조그마한 빛줄기 사이로 모든 것을 보았던 어제처럼, 감히 숨소리라도 날까봐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어제처럼.
연극에 서본 적도 없는 아이가 주인공을 맡았더라. 그 올프랑쥬 씨의 여동생이라던데. 후문이 무얼 뜻하는지 알 대로 아는 이네스다. 배운 대로, 이네스는 호흡을 내뱉는다. 후우우. 이네스는 성실하게 연습하고 있었고 가르치는 사람도 인정하는 바였다. 실력은 빠르게 늘고 있었다. 순조로웠다. 숨을 다 뱉고 나자 맨 밑바닥이 턱, 숨 끝에 걸리고 만다. 다시 배운 대로 숨을 들이쉰다. 밑바닥은 소리없이 다시 밑으로 밑으로 내려간다. 그를 사랑하지 말라던 붉은 머리카락이었다.
이네스는 밀라르가 싫지 않았다.
관계자 사이 입담은 여주인공에게 어떠한 필터도 없이 들어왔다. 가끔은 정말로, 쥬시탕트 양과 무슨 사이냐고 묻고 싶었으나 이네스는 말 없이 연습만 했다. 이네스는 나중에 그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하마터면 ‘쥬스틴느 양과 무슨 사이냐’고 물을 뻔 했으니. 금세 알아듣고 웃어 넘어갈 제작자라고 해도 이네스는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애초부터 밀라르를 연적으로 생각한 적도 없었지만, 이네스는 밀라르가 정말 싫지 않았다.
이네스는 옷이 궁금했다. 공연 당일 입을 옷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그렇다 해도 공연장 의상실에는 제법 당당한 자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옷은 많았으나 하나같이 낡은 모양새였다. 실이 삭아있다. 꽤 두툼한 원단에는 보풀이 일어났다. 하얀 드레스를 가볍게 손으로 잡고 눈가로 가까이 대어본다. 이네스는 이윽고 가로세로 교차한 실을 본다. 저들끼리 꼭 껴안은 선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서로 붙어있었을까. 여주인공은 그런 생각도 했다. 마리 드 트루아가 그런 생각을 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히스파니에 씨가 그렇게 열심히 마리 드 트루아를 설명해주었는데, 나는 아직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구나. 선이 면이 되는 일 만큼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으니, 여주인공 이네스는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밀라르는 그곳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 이네스는 밀라르가 좋았다. 옷으로 가려진 분장실에서, 밀라르의 목소리가 바닥으로부터 들려왔다. 그런 밀라르가 좋아 이네스는 그녀를 따라했다. 그녀를 따라 눈을 보고, 함께 웃고, 실 없는 소리도 좀 하고. 사람들의 악의에 너무 많이 찔려 상처받고 무딘 마음도 금세 알 수 있는 ‘아무 감정 없는’ 마음이었다. 편안했다.
누워있는 이네스는 밀라르를 담은 마루와 옷 사이가 꼭 무대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넓은 선이었다. 옷과 마루가 밀려난 사이로 마련된 무대였다. 무대 위 캐릭터가 관객하고 직접 이야기를 나누다니, 이네스가 연극에 식견이 넓은 사람은 아니었건만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괜찮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재미있었다. 재미는 재미였지만, 무대는 극 이상을 담아내지 못했다. 이네스는 밀라르를 알 듯 했다. 무대 위 이네스는 몰라도, 사람 이네스는 밀라르를 이해했다.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히스파니에의 여자친구가 된다는 선택지를 지우고 나머지를 고민하는 사람. 이네스는 단상 너머로 고개를 조금 내밀었다. 무슨 뜻일까? 조금 귀엽고 유치해지고 싶었다. 몇 살 어린 여자아이들이 친구끼리 그러듯.
- 네가 하려는 말이 뭔지 알아.
이네스는 옷을 비집고 나왔다. 사람 이네스는 밀라르를 이해했다. 그러니 밀라르의 말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괜한 질투심이 아님도 알았고 그냥 하는 말이 아님도 알았다. 그러니 밀라르 앞에 사람 이네스로 서야 했다. 사람 이네스는 사람 히스파니에 씨를 좋아한다고. 그리고 너도 싫지 않다고.
그건 모두 밀라르와 히스파니에 씨의 이야기였는데.
이네스는 눈을 감는다. 찬 손가락이 물기를 머금고 살갗을 스친다. 본래는 이 손가락도 따뜻함을 이네스는 모르지 않는다. 모르는 건 아닌데. 분장을 받는 여주인공은 자꾸만 불안해진다. 초조해진다. 어쩌면 좋을지 그네는, 하나도 모르겠다. 눈꺼풀이 살짝 들린다. 자의(自意)였다. 붓은 속눈썹을 품은 여린 점막을 차갑게 훑는다. 선 하나 좀 유려하게 그을 뿐인데. 반 넘게 감긴 동공 사이로 가는 빛이 보인다. 이번에는 어제와 같지 않다.
클로버가 펼쳐진 그 곳에 다시 한 번 가본 적이 있었다. 클로버가 모두 졌다. 이네스는 풀 밖에 없는 밭을 바라본다. 이 들도 봄에는 새하얀 별 천지였다. 이네스는 돌연 이유도 모를 자신감이 생긴다. 어쩌면 자신은 칼라이소에서 제일 예쁜 화관을 만드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그 어떤 솜씨 좋은 사람보다. 어쩌면 노래도 잘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꽃처럼 싱그러운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네스는 뻥 뚫린 풀밭에서 마음껏 샘솟는 자신감을 내버려둔다. 히스파니에 씨는 그 자신감이 결국 시작이라고 했다. 이네스는 마음이 두근거렸다. 꼭 자신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꼭 연심 때문만도 아니었다.
이렇게, 네 목소리가 포물선을 그린다고 생각해봐. 멀리 뻗어나가게. 이네스는 그 말을 언제나 되새기고 목소리를 낸다. 이네스는 어릴 적 클로버꽃이 다시 생각난다. 꽃대가 길게 뻗은 꽃일 수록 좋았다. 꽃대가 길면 쓰임새가 많았다 화관을 만들어도 목걸이를 만들어도 예뻤다. 이미 있는 화관 줄기에 추가해도 잘 섞여들었다. 꽃대가 길면 꽃도 조금 더 큼직했다. 꽃대가 짧은 꽃은 새끼손가락 한 마디 만 하다면 꽃대가 긴 꽃은 엄지손가락 한 마디 만 하다. 꽃들 사이에선 유의미한 크기 차이다.
이네스는 화장이 끝난 자신의 얼굴을 잠시 바라본다. 완벽하다. 그이기에 완벽하다. 그를 사랑하기에 오늘까지 연습한 것은 아니다. 이네스는 오늘이 좋아서 오늘까지 연습을 했고 그 길에서 그를 사랑하게 되었을 뿐이다. 아름답다고 생각한 이네스는 자신이 유의미하다고 느낀다. 그에게 유의미하든, 그 무엇에게 유의미하든 상관없다. 꽃의 크기가 다른 만큼이다 커다란 차이다. 유의미하니 나는 당신을 궁금해해야겠다. 그럴 수 있다. 이네스의 믿음이었다. 당신은 이제 어떻게 되는지. 어떻게 불러야 좋을지 모를 당신은 이 무대를 어떻게 할 생각인지. 클로버로 하얀 화관을 만들 때처럼 그저 그의 습관일지도 모르지만, 이네스는 그가 자신의 의식 속에서 자신의 앞을 결정했으리라 생각했다. 그 모든 궁금증은 하나로 향한다.
당신은 죽어선 안된다고. 당신이.
클로버는 또 그 들판에 자랄 것이다. 이네스는 확신한다. 꽃대를 쑥쑥 뽑아도 가는 뿌리는 땅 속에서 살아남아 꽃대를 밀어올리겠지. 어린 이네스가 고사리손으로 꾸민 화관만큼 다시 자라겠지. 이네스는 급하게 달린다. 그미는 모르는 머리카락 끝이 꽃잎처럼 나부낀다. 흩날린다. 이네스는 굳게 믿는다. 잡초는 손가락으로 그은 모래사장만큼 강하다고. 그러니 나도 강하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