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_어떤 시작과 끝
누군가 깨우기라도 한 것처럼 눈이 뜨였다. 아직 푸르스름한 빛으로 잠겨있는 새벽이었다. 창을 연 이솔렛은 자욱한 안개와 마주했다. 습기를 머금은 여름 공기가 창을 비집고 들어왔다. 뒤숭숭한 공기가 자신을 밀어내듯 움직여 이솔렛은 다시 창을 닫았다. 예상치 못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집 안의 공기가 소근거리며 이솔렛의 마음을 흐트러뜨렸다. 잠시 켜둔 초가 흔들리며 연기를 피워올리는 모양새를 지켜보았다. 오전의 일정까지는 시간이 충분할 정도로 많이 남았다. 이솔렛은 손으로 불을 꺼트렸다. 닫힌 공간에서 혼란함과 마주하고 있을 바에야 직접 안개 속으로 들어가는 편이 나았다. 평온하지 못한 마음으로는 무슨 일과 맞닥뜨릴지 알 수 없었다. 집을 나서는 등에는 검이 매어져 있었다.
바람 없는 고요한 아침이었다. 낮게 깔린 안개가 발에 차였다. 깜깜한 밤에도 길을 잃지 않을 만큼 익숙한 곳이건만 안개로 뒤덮인 모습은 낯선 모습이었다. 변한 건 아니지만 바뀌지 않았다 이야기하기도 어렵겠지. 그리 생각하던 이솔렛은 커다란 나무 앞에 멈추어 섰다. 곧 해가 뜰 시간이었다. 높은 곳은 조금이나마 명확한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 나무의 높이를 가늠하던 이솔렛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나무는 어릴 적 일리오스와 올라본 기억밖에 없었다. 그동안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아놓고는,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럼에도 이솔렛은 가볍게 몸을 솟구쳐 나무에 올랐다.
그새 몸에 열이 올랐던가, 높은 곳의 공기가 시원스러웠다. 안개가 거미줄처럼 나무에 엉겨있었으나, 해가 빛나는 것은 볼 수 있을 듯싶었다. 먼 곳부터 주홍빛이 물들기 시작하더니, 해가 떠올랐다. 안개는 멀리서부터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옅어지는 안개와 함께 소란했던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긴장했던 몸이 느슨해지며 비로소 시야가 넓어졌다. 하필이면 오늘 그리 번잡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게 된 건 이유가 있을 거라고. 오늘 역시 조용하지는 않을 하루이기 때문에.
어느 날 이솔렛은 오두막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내다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내게 남겨진 시간 모두를 이 공간 안에서의 고립을 위해 쓸 것인가? 때때로 섬의 전통에 참여하며 조언을 주기는 하였으나, 이 질문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일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지식을 가진 이로서 섬의 일부가 되는 것과, 개인과 사회로 섬을 마주하는 것은 다르다. 비록 자신의 의지로 입을 열 때마다 조금씩 내몰릴 수는 있겠지만, 자신은 내몰린다 하여 목숨을 내버리진 않을 것이다. 죽음 이후의 무(無)와 자존심은 상응할 가치가 없는 저울질이다.
그렇다면, 자존심과 자발적인 고립 역시 대립할 것이 아닐지 몰랐다. 자신의 자부심은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것. 때문에 이외의 것은 조금씩 당겼다가 풀어주며 유연하게 대응하면 그만이다. 그리 결정을 내린 이솔렛은 그 이후로 섬에 얼굴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산 위에서 조용히 지내던 때였다면, 이런 마음을 맞은 날엔 산 깊은 곳으로 들어가 오랜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가라앉혔을 것이다.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홀로 시간을 보내며, 제 밖의 것들은 모조리 끊어내면서.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제 선택으로 일어난 변화는 자신이 받아들이고, 감내할 일이다. 그러므로 결정과 선택에 후회는 없다. 일어난 일은 다시 제 손으로 잡을 일이다.
그사이에 해가 모두 떠올라 언제 안개가 끼었냐는 듯 날이 개었다. 이솔렛은 혼탁했던 마음을 나무 위에 두고 뛰어내렸다. 땅에는 아직 안개의 습기가 남아있었다. 일순 해가 내리쬐지 않는 이상은 순식간에 사라지진 않을 터였다. 이솔렛은 약간의 발자국을 남기며 다른 길로 되돌아갔다.
작은 회의가 열렸다. 중대한 사항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사소한 안건도 아닌 회의. 잠시 섬을 둘러보러 자리를 비운 나우플리온은 자신의 공석을 이솔렛에게 맡겼다. 굳이 공석을 채울 자리도 아니었건만, 나우플리온은 이런 자리에 이솔렛을 자주 불러냈다. 나우플리온은 이솔렛에게 넌지시 사제 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이솔렛은 당신이 건강해졌으니 그럴 이유가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으나, 이렇듯 돌려 말하는 부탁은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었다.
참여자가 몇 없는 회의장, 섭정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갈수록 건강이 악화되던 섭정은 결국 작년에 공식적으로 앓아누웠다. 제대로 된 메세지도 남기지 못하게 된 섭정 대신 리리오페가 섭정의 자리에 섰다. 섭정의 후계자이긴 하나 정식으로 섭정에 오른 것은 아니기 때문인지, 리리오페가 섭정의 자리를 채웠다, 는 느낌은 없었다. 갓 스무 살이 된 후계자가 차근한 정치적 발판 없이 바로 통치자로 올라서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는 듯했다. 여섯 사제와 몇 수도사들이 그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으나, 그가 제대로 된 섭정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할 듯싶었다.
이미 오래전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갖추었던 리리오페는 실질적인 준비는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섭정은 적어도 자신의 정치적 방향성이나 계략을 딸에게 모두 물려준 후에야 통치권을 내려놓을 계획이었던 듯싶었다. 그러나 사변은 그들이 예상치 못한 시기에 일어났다.
문제의 정화의식 이후로 리리오페는 결혼의 의지를 드러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결혼에 대한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딸을 아낌에도 여자를 믿지 못했던 섭정은 의식을 잃기 전 후계자가 반드시 배우자를 맞이해야 한다는 메세지를 거듭 남겼다. 섭정이 조용해지자, 그동안 리리오페의 권위와 의사에 밀려 입을 다물고 있던 펠로로스가 다시금 헥토르와의 결혼을 크게 떠들기 시작했다. 펠로로스는 충분히 섬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자였고, 그게 1년 전에 시작된 일이다.
리리오페는 오늘 회의에 불참했다. 이솔렛은 리리오페의 빈자리에 잠시 눈길을 주었다. 이솔렛과 그의 빈자리가 떨어져 있는 만큼, 이솔렛은 리리오페의 일을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리리오페의 행보는 섬의 분위기와 일상을 바꾸겠지만, 그건 이솔렛에게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섬이 어떻게 바뀌든 그는 이솔렛이었고 그에게 리리오페는 그저 리리오페일 뿐이었다.
이솔렛이 얼굴을 내비치기 시작한 건 원대한 뜻을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욕망 때문이었다. 때문에 리리오페의 일에 신경을 쏟지 않는다. 다만, 어떤 식이든 자신의 행동에 정치적 메세지가 덧씌워질 것을 짐작하면 리리오페의 순탄치 않은 통치 행보에 따라붙는 생각이 많아질 따름이었다. 한때는 어떤 방식이든 자신과 리리오페는 대립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인 이유든, 타고난 성향이든, 지킬 위치건 간에. 그러나 변화와 흐름은 이솔렛이 생각한 방향으로만 일어나지 않았다.
회의가 파하고 돌아오는 길은 소요한 오늘의 흐름답지 않게 평이했다. 어린아이들이 이름 모를 하얀 들꽃으로 화관을 만들어 쓰고는 장난스레 뛰어놀고 있었다. 이솔렛은 함께할 형제를 원했던 어린 시절의 향수를 떠올리곤 살짝 미소지었다. 언뜻 걸음을 멈추었던가, 스콜리에 다닐 법한 나이의 소녀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저…, 이솔렛 님."
울림이 좋은 목소리였다. 소녀는 다가와 놓고도 쉽사리 말을 꺼내기 어려운지 이솔렛의 눈치를 살폈다.
"이솔렛 님이 오래전에 찬트를 가르치신 적이 있다고 들었어요. 혹시 찬트를 다시 가르칠 생각이 있으신가요? 찬트라는 걸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는데, 얼마 전에 작은 기원을 드리는 걸 보게 되어서……! 노래에는 노래 이상의 것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저도 제 노래로 노래 너머의 것을 펼쳐보고 싶어졌어요."
이솔렛은 대답 없이 소녀를 바라보았다.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소녀가 저, 노래는 잘 할 수 있어요! 하고 다급하게 덧붙였다. 얼굴을 내보인 이후로도 이솔렛은 능력을 잘 보이지 않았다. 이솔렛이 가진 능력은 개인의 선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내보여도 좋을 건 얼굴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방식으로든 얼굴을 보인 이상, 조금씩 능력을 내보이게 되었다. 어쩌면 이솔렛 자신도. 선택 이후로 일어난 변화는 이제 제 손을 떠나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얼굴을 보이고 있었다.
이솔렛이 대답을 미루는 사이, 멀리서 뛰어놀던 화관을 쓴 아이들이 주변까지 달려와 개구지게 놀고 있었다.
"야, 그거 차!"
"발로 차면 신발 날아간단 말이야!"
"빼지 말고! 너, 검의 길로 가면 잘할 거잖아."
"난 검 싫거든? 내가 몸 쓰는 걸 좋아하는 거랑 내가 하고 싶은 건 별개야. 검의 길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이솔렛은 다시 멀어져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찬트를 가르친 적은 딱 한 번 있어. 그때가 처음이었고, 그리고 마지막이었어.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다시 생각해본 적은 없어."
소녀의 얼굴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나는 사교적이지도 않고, 그때도 거절했었듯 누군가를 가르칠만한 인물은 못 되어서."
거절의 마무리 말을 하려던 이솔렛은, 아이들이 뛰던 자리에 떨어져 있는 꽃잎을 보았다. 섬은 닫혀있지만 곳곳에선 변화가 일어난다. 다수에 의한 변화일 수도 있고, 의지를 가진 개인으로 시작되는 변화일 수도 있다. 애매한 분위기가 감도는 지금, 누군가에겐 그저 지나가는 몇 년이 되겠지만 누군가에겐… 평생의 방향성을 결정짓는 시기가 될지도 모른다. 어차피 통제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면, 손을 뻗어 방향을 제시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기에 어쩌면…….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거야. 이름이 뭐지?"
"브리지타예요!"
"그래, 브리지타. 어떤 방향이건 마음이 결정되면 연락을 하도록 할게."
"감사합니다, 이솔렛 님! 안녕히 가세요!"
소녀의 밝은 배웅을 받고 이솔렛은 마을 어귀를 빠져나왔다. 어쩌면 단순한 충동일지도 몰랐다. 가르친다니. 다시? 하지만 그리 변하도록, 오래 전부터 많은 일들이 쌓여온 걸지도 몰랐다.
냇가를 지나치던 이솔렛의 눈가에 하얀빛이 들어왔다. 하얀 꽃들이 피어있었다. 카라. 흰빛이 햇빛에 반짝이는 듯했다. 같은 빛을 달고 뛰어놀던 아이들이 떠올랐다. 잠시 냇가에 서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듣던 이솔렛은 결국 가지고 다니는 작은 칼로 카라를 몇 줄기 잘라냈다. 한아름 꽃이 안기자 싱거운 웃음이 났다. 꽃다발이라니. 생소한 조합이었다.
싱거운 웃음이 났던 만큼, 집에 돌아와서도 꽃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 구색에 맞는 화병이랄 것이 없었다. 투박한 컵에 꽃을 꽂아두니 어울리는 듯, 아닌 듯 조금 웃음이 나오는 모양새였다. 다만 자주 봐왔던 꽃이기에 집에 있는 것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직접 들어본 적이 없을 뿐, 카라는 결혼이나 장례에 자주 쓰이는 꽃이었다.
이솔렛은 꽃이 오래 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집 안에 남아있던 공기를 몰아냈다.
번잡했던 하루가 내려앉을 즈음,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문밖으로 붉은 머리가 서 있었다. 본인도 그리 달갑지는 않은 듯, 귀도 조금 붉었다.
"당신, 날 언제까지 문 앞에 세워둘 거야?"
톡 쏘는 듯한 목소리였다. 불쾌할 만한 일을 벌인 건 본인임에도.
"용건을 말해."
이솔렛의 말에 리리오페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정리된 표정 위로 권위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제안을 하러 왔어."
몇 년 전 가까이에서 들었던 어린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도, 자신도 더 자란 것이다.
"이건 공식적인 방문은 아니야. 하지만 동시에 공식적인 제안이기도 해. 문밖에서 할 이야긴 아니니 자리 좀 내어주겠어?"
이솔렛은 마주앉은 리리오페에게 차를 내주었다. 김이 오르는 차에서는 아무런 향도 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로 향 없는 김만 떠돌고 있었다.
"나와 손을 잡자, 이솔렛."
이솔렛은 대답 대신 리리오페를 보았다.
"당신이 나와 손을 잡을 만큼의 무언가가 없다는 건 알고 있어. 당신은 은둔자였고 나는 고귀한 사람이지. 한때는 당신이 다시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할 권위가 내게 있었어. 하지만 이젠 상황이 바뀌었지. 고군분투하는 날 보았으니 당신도 잘 알 거야.
나는 귀한 혈통을 가졌지만, 아버지의 빈 자리가 생각보다 커. 단지 내가 나이가 어리기 때문인지, 배우자가 없는 어린 여자이기 때문인지는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이지만 어쨌건 만만한 상대라는 건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중이지."
리리오페는 차에 입을 대지 않고 다만 컵을 꽉 쥐었다.
"당신에겐 내게 없는 재능과 지식이 있지. 사실 난 그런 건 필요 없어. 하지만 그 지식과 재능은 지 금의 분위기와 흐름을 충분히 바꿀 힘이야. 그렇기 때문에 나도, 아버지도 늘 당신이 입을 여는 걸 꺼려했지.
무슨 이유로 은둔을 그만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이 다음 검의 사제가 될 생각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검의 사제는 힘의 구심점이야. 비록 당신이 관심이 없다 해도, 다른 사람들은 그 힘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지금의 나를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테지?
나는 타고난 권위를 남에게 나누어주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 내게 도움을 주는 자들도 진심 어린 마음은 없어. 그런 마음이라면 언제고 이 상태를 벗어날 수 없겠지. 그렇기에 난 내 손으로 당신에게 제안을 하러 왔어. 난 내 스스로 섬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니까."
우스운 제안이었다. 동시에 절박해 보였다. 섭정의 자리가 무엇이기에 저에게까지 찾아와 손을 내미는 것일까. 더더욱 감히 저의 아버지를 몰아낸 자리를 위해 손을 잡자 제안하는 것인지. 여전히 오만한 아이였다. 그러나 그간 무던히 노력했는지, 그의 얼굴 곳곳에 깃든 피곤과 외로움이 느껴졌다.
"그 제안에 거절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찾아왔겠지? 다른 무엇이 있더라도 넌 고귀한 사람이고, 그만한 제안은 달콤하여 누구든 받아들일 거라고 말이지. 우습게도 대상이 누구인지 고려도 하지 않은 채.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열기 위해 그간 내가 왜 그리 살기를 선택했는지 생각은 해봤을까, 리리오페."
"당신은…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지 않아? 그렇기 때문에 산에서 내려오곤 하는 게 아니었어? 지금 난 당신에게 큰 기회를 주는 거야. 이 와중에 아량 넓게 베푼다는 뜻이 아니야. 당신 역시 바뀔 수 있는,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라고. 물론 내가 이런 상황까지 내몰리지 않았다면 당신에게 손을 잡자는 이야기 따위는 절대 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찾아온 기회 정도는 정당하게 생각할 수는 없는 거야? 당신은 여전히 오만해."
"그런 말을 네 입에서 듣다니, 여전히 너도 웃기는구나. 네가 원한다는 이유 하나로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다는 건 너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네가 단지 원하기 때문에 요구할 수 있다면, 나 역시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이유 불문하고 거절할 수 있어."
"잘 들어, 이솔렛. 이건 명령이 아니야. 하지만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야. 그 똑똑한 머리로 잘 생각해봐. 난, 내 손에 쥔 걸 어느 정도 포기하더라도 여전히 내가 가진 걸 지킬 수 있어. 하지만 당신은 아니지. 게다가 뭔진 몰라도 뭔가를 새로 원하게 됐잖아? 이런 기회는 내가 이곳의 통치자로 살아가는 동안은 다신 오지 않을 거야. 이건 반쯤은 협박이야.
그러니 당신은 선택해. 지금까지 살아왔던 대로 이곳에 틀어박혀 살아가거나, 내키지 않는 손을 잡고 섬을 바꿔보거나. 어렵지 않은 선택지지."
그간 리리오페에게 한 발 떨어져 있을 수 있었던 건 그와 부딪치지 않았기 때문이 틀림없었다. 유연함을 다짐했던 것이 무색하도록 쏘아붙인 것이 우스울 정도였다. 자신은 여전히 자존심을 굽힐 생각이 없구나. 그러나 그럼에도 리리오페의 제안은 들을만한 것이었다. 기껏 깨닫고 받아들인 변화는 느리고, 희미했다. 변화는 이런 때에 찾아온 기회를 타고 기세를 떨치는 게 좋을 일이다.
분명 그러하지만, 이솔렛의 자부심과 감정적인 것들이 리리오페를 상대로 받아들이기를 어려워했다. 이따금 미래와 관계를 그려보곤 했지만, 리리오페는 단 한 번도 긍정적인 위치에 놓였던 적이 없었다. 이솔렛은 감정적인 이유로 결정을 유보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변화의 소용돌이 안에 놓여있다고 생각했다.
선뜻 답을 내놓지 못하던 이솔렛은, 리리오페의 너머로 보이는 카라를 보았다. 햇빛을 머금는, 흰 꽃. 누군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해주기도 하며, 또 어떤 삶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기도 하는 꽃. 그리고 제 앞에 앉아있는 리리-백합 역시 하얀 꽃인 것이다. 이솔렛은 약간의 충동을 담아 입을 열었다.
"너와 나는 같은 점이라곤 단 한 가지도 꼽을 수 없을 만큼 대척점에 있지. 그렇게나 다름에도, 한순간 고개를 돌리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맞붙을 유사성이 있기도 하고.
백합도, 의외로 카라와 그렇게 다르게 생기지 않았어. 비록 백합은 해를 피해야만 하고, 카라는 해가 필요한 존재지만. 그럼에도 두 꽃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은 같은 시기에 핀다는 것일지도 모르지."
리리오페는 이솔렛의 말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다, 이솔렛의 시선을 따라 제 너머에 있는 꽃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좋아. 네 제안을 받아들이겠어."
이솔렛은 일어서 마침내 리리오페에게 진짜 손을 내밀었다. 리리오페는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손을 맞잡았다.
"후회하지 않을 거야, 이솔렛. 난 모든 걸 줄 수 있으니까."
거창한 말은 없었다. 다만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